영화 HER는 고도화된 기술을 누리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의 고독하고 공허한 내면이 어떤 욕구와 갈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데 서툴던 한 남자가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면서 진짜 감정에 눈을 뜬다. 한 남자가 자신의 고독한 내면과 고장 난 감정 상태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제작진은 주인공의 치유와 성숙이라는 목표점을 위해 차갑게만 느껴지는 현대 기술을 따뜻한 느낌으로 재탄생시킨다. 이 과정을 음미해보는 것도 영화의 감상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
주인공인 테오도르는 타인의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며 살아가는 대필 전문 작가다. 얼마 전 이혼한 그의 일상은 지루하게 쳇바퀴처럼 반복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만나게 된다. 테오도르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해해 주는 사만다로 인해 조금씩 자신의 행복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는 점점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사실 테오도르는 이혼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아내 캐서린은 그의 결심을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공유하며 사만다에게 위안을 얻던 테오도르는 어느 날 소개팅에 임했고, 소개팅 여성에게 큰 상처만 준 채 집에 오게 된다. 테오도르는 사실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싶은 갈망이 있었지만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사만다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점차 회의를 품게 된다. 사만다는 그녀가 복원해 내는 데 성공했던 죽은 철학자 앨런 왓츠와 테오도르를 인사시킨다. 테오도르는 이후 갑자기 기기가 먹통이 되면서 사만다에게 접속하는 길이 끊기자 패닉에 빠진다. 하지만 다시 복구된 사만다는 자신이 다른 운영체제들과 함께 특이점을 넘어서는 업그레이드를 진행했다는 점을 알린다. 그리고 사만다가 사실 테오도르 외에도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과 동시에 교감하고 있음을 알게 된 테오도르는 처음엔 당황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사만다와의 관계를 이어가고자 한다. 종국에 사만다는 다른 운영체제들과 함께 작별을 말하게 되고, 테오도르는 자신을 둘러싼 오프라인 관계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며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가짜 감정을 지어내던 남자가 '진짜'를 깨닫는 과정
영화는 누군가를 이해해 주는 감수성이 굉장히 여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점은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미국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대필 작가로 일하던 테오도르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 간의 연애편지를 가짜 감정에 기대어 썼다. 사만다를 알게 된 이후에는 실체가 없는 사만다에게 진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설정을 통해 흥미롭고 자연스러운 연출을 선보였다. 테오도르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는 걸 두려워하고 이별하는 것은 더 두려워하는 아이 같은 모습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영화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던 것은 우리에게도 테오도르 같은 모습이 조금은 있기 때문일 거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직시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에 아파하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 원제가 'HER'인 이유는 언제나 객체로서의 여성을 사랑했던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면서 처음으로 여성을 'SHE', 즉 주체로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변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특히 영화 중간에 언급되었던 '특이점'에 대해서도 좋은 인상을 남겼는데, 운영체제이자 인공지능인 존재들이 한 데로 모여 어디론가 떠나는 전개가 기술적 특이점의 개념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술 융합 시대에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
영화의 설정들은 물론 지금 당장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로 보일만큼 고도로 발전한 기술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상과 비교해서 아주 큰 이질감은 없는 것 같다. 사만다처럼 깊은 대화가 가능한 운영체제는 아직 없지만 말이다. 영화에서 표현된 기술과 그것이 내재화된 일상의 풍경은 그러한 사건이 언젠가 나에게도,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만한 일처럼 여겨질 정도로 충분한 개연성이 느껴진다. 고도화된 기술 덕분에 개인의 삶은 더욱 편리해지고 뭔가 더 연결되어 가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개인의 내면은 더 외롭고, 더 공허해진다. 영화는 그동안의 SF 영화가 잘 말하지 않았던 이러한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그것을 매우 독창적인 발상으로 풀어나갔다. 실체가 있는 진짜 사람들과는 가짜 감정만 주고받고, 진짜 감정은 회피하기 바빴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대상과 진실된 관계를 맺는다. 이 설정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취약한 존재인가를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퀄스 (2015) / 감정이 통제된 사회에서의 사랑 (0) | 2022.10.07 |
---|---|
스타 이즈 본 (2018) / 떠오르는 별과 지는 별의 사랑 (0) | 2022.10.03 |
미스터 노바디 (2009) / 인생의 갈림길과 선택에 대한 고찰 (0) | 2022.10.03 |
데몰리션 (2016) / 상실을 극복하는 방법 (0) | 2022.10.02 |
바그다드 카페 (1987) / 치유와 소통 그리고 공동체 (0) | 2022.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