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 2022. 10. 2. 03:04

데몰리션 (2016) / 상실을 극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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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데몰리션의-한장면-캡쳐

누구에게나 상실은 고통스럽다. 상실의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상실의 슬픔을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애도'라는 것쯤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상식으로 통용된다. 반면, 상실과 애도 그리고 극복의 과정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2016년도 개봉작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 데몰리션은 한 남자가 상실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지루하지 않게, 독특한 시각으로 담아냈다. 상실과 극복이란 소재는 사실 자칫하면 뻔한 흐름이 될 수 있지만 작품은 이 점을 영리하게 피해 갔다.

아내를 떠나보낸 한 남자가 상실을 처리하는 방식

데몰리션은 파괴하다 라는 뜻이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상실의 고통을 겪은 한 사내의 마음을 '부수다'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묘파한 영화다. 남자는 의사로부터 심장의 한 부분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매미나방에게 물려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나방은 언젠가부터 남자의 몸에 기어 들어와 심장을 조금씩 갉아먹었다고 한다. 데이비스는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기 전 자신의 삶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장인어른의 회사로 달려가서 일을 했다. 유리와 금속으로 치장된 그의 집은 흠 하나 없이 깨끗하고,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부유함으로 넘친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운전을 하던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아내의 장례식에서 데이비스는, 우는 연습을 해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심장의 일부가 사라진 남자였으니 말이다. 조문 기간이 끝나자마자 그는 회사로 달려가 일부터 하려 든다. 모두가 비탄에 빠져 있는데 데이비스만 멀쩡해 보인다. 그는 이런 스스로를 보며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데이비스는 아내라는 중요 대상을 상실한 슬픔을 단단히 방어한다고 볼 수 있다. 방어기제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을 거부하거나 왜곡하는 무의식적인 심리 기제를 일컫는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관련된 감정을 의식에서 떼어내는 고립 방어기제로 자신을 방어하는 것도 가능하다. 데이비스의 심장이 없어졌다는 판타지는 데이비스의 감정이 억눌리고 무의식에 숨겨진 것을 의미한다. 아내가 없어져서 슬프고 혼자 남겨진 감정은 억압되어서 의식에서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이, 의식과 무의식이, 흰자와 노른자처럼 분리되어 버렸다. 평소에도 데이비스는 출퇴근 기차에서 매일 보는 사람에게 본인이 매트리스를 판다고 거짓말을 해 왔다. 사실 그는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 형성을 피하고 진실한 관계 맺기를 두려워했다. 삶을 완벽히 통제하고 감정을 억압하면서 살아왔기에 아내에게조차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 아내가 죽은 뒤 그는 아내의 죽음보다 사소한 것에 오히려 분노를 표출한다. 감정을 계속 통제하니까 엉뚱한 곳에서 감정이 새어나가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서서히 더 큰 균열이 마음에서 파열음을 일으킨다. 달리는 기차를 멈추고, 자판기 회사의 이름도 모르는 담당자에게 서비스 불만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쓰고,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분해한다. 데이비스의 해체 행동은 점점 강박적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해체는 재건의 또 다른 이름

영화의 중요한 주제는 해체다. 여기서 해체는 그저 물건의 분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데이비스의 두꺼운 마음의 껍질, 즉 자신의 방어기제를 스스로 깨는 과정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가면 자아, 즉 페르소나를 벗는 과정이라고도 해석된다. 데이비스가 그동안 누구의 남편, 누군가의 사위, 누군가의 상사 같은 사회적 요구에 대해 반응하며 살아왔다는 것은 가면을 쓰고 살았다는 의미다. 이러한 외부의 요구를 저버리고 내면의 충동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그것을 깨는 과정이 된다. 자판기 회사 상담사인 카렌은 자신의 회사 사장과 의미 없는 연애를 하며 공허한 상태고, 그녀의 아들 크리스는 성적 정체성의 문제로 방황한다. 어쩌다가 데이비스와 엮인 카렌은 데이비스에게 상실의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극복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조력자로 역할한다. 그들과 일시적으로 함께 살게 된 데이비스는 분해를 하던 사람에서 오히려 분해를 당하는 사람이 된다. 말끔한 정장 차림이 아니라 셔츠가 바지 밖으로 나온 채 사람들을 만나고, 길거리에서 음악에 맞춰 기이한 춤도 춘다. 크리스가 원하자 방탄조끼를 입고 총알을 직접 맞기도 하고, 철거 작업을 하다가 발에 대못이 박히기도 한다. 그제야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말이다. 데이비스는 일부러 철거 현장에 가서 철거 작업을 하는 것을 자원한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다. 자신의 감정에 접촉을 하고, 자신의 기억에 접속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잔혹한 진실이 오히려 덜 아픈 법이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집을 모조리 부숴버린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아내의 서랍장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아내를 많이 사랑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 과정이 독특하다. 서랍장에서 발견된 아내의 비밀은 발에 박힌 못보다 더 아프다. 아내는 임신 후 낙태를 했었고 그 아이는 데이비스의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때로 잔혹하고 울퉁불퉁한 진실이, 매끄럽고 피상적인 표면을 가진 거짓보다 덜 아플 때가 있다는 것을 영화는 말해준다. 아내의 외도가 분명해졌지만, 데이비스는 오히려 아내가 냉장고에 붙여 둔 '그만하고 나를 고쳐줘요'라는 메모를 아프게 떠올린다. 아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혼란스러웠을지를 깨닫고, 아내와의 행복한 한때를 기억하며 자동차 안에서 마침내 그는 목 놓아 운다. 이제 데이비스는 모든 심리적 방어를 뚫고 현실을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롭게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그는 그제야 '네가 내 딸 대신 죽었어야 된다'라고 소리쳤던 장인과 화해를 할 수 있게 된다. 때로는 부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유리 같은 마음을 말이다. 내 마음을 둘러싼 모든 갑옷의 방어들을 말이다. 해체는 건설의 또 다른 이름이고, 고통은 마음을 이어 붙이는 아교풀이 될 수 있다. 깨지기를 두려워하기보다는 마음껏 깨져도 좋다는 태도가 영혼을 강건하게 만든다. 해변에는 아내 줄리아의 이름을 딴 회전목마가 개장하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길었던 상실의 터널을 지나 찾아온 또 다른 마음의 선물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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