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 2022. 9. 29. 01:31

박사가 사랑한 수식 (2005) / 숫자로 표현되는 인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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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사랑한-수식의-한장면-캡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본 것은 대학 졸업반이던 스물 세살쯤, 내 방안에서였다.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의 추천 혹은 꼭 봐야 되는 영화 리스트 같은 것들을 보며 영화라는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스토리는 간결했고 자극은 적었다. 이 영화를 떠올리면 따뜻하게 덥혀진 온돌방처럼 훈훈한 온기가 먼저 떠오른다. 수식이나 수학이라는 딱딱한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인간애가 가득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또한 수학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수의 성질이나 미처 알지 못했던 수학적 상식도 함께 들어볼 수 있어 흥미롭다.

80분만 기억하는 노교수, 그와 함께 보낸 시간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오가와 요코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교사가 된 루트가 교단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전개된다.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였는데, 루트가 10살이던 어린 시절 박사의 집에 가사 도우미로 출근했다. 박사는 과거 사고의 후유증으로 기억이 그 당시에 멈춰 있으며, 일상의 기억도 80분만 지속되는 희귀한 증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박사는 형수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런 후유증으로 인해 형수의 외모가 점차 노화되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다. 박사는 원래 대학에서 수학과 교수로 일하며 돈을 벌었지만 사고로 인해 해고되면서 형수가 타는 연금에 기대 생활하는 처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숫자로 치환해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때문에 박사는 루트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머리카락 끝이 수학 기호 루트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루트의 어머니가 박사의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이들은 인간적으로 점점 가까워진다. 어느 날, 박사가 고열에 시달리며 아프게 되었는데, 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루트의 어머니를 보고 형수는 이들의 관계를 불륜으로 오해한다. 형수는 이후 루트의 어머니를 해고하지만 어린 루트는 계속해서 박사를 찾아간다. 사실 진짜 불륜 관계는 박사와 형수였고, 루트의 어머니가 형수에게 박사가 해준 이야기를 전하며 설득한다. 그녀는 결국 다시 박사의 집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루트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간결하고 단아하며 온기 가득한 이야기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내용은 일반적이지 않다. 이 영화는 보면 볼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가족애에 관한 영화다.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일종의 '유사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박사는 세상만사를 숫자로 설명한다. 관계의 의미를 부여할 때도 숫자를 동원하고 누군가의 생일이나 발 사이즈를 듣고도 그 숫자에 대한 느낌을 진심으로 표현한다. 박사는 사실 그것을 통해 삶의 의미나 인연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박사의 기억은 80분이지만 몸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메모지로 기억력을 보완하며 살아가는데, 이 메모지에 가장 중요하게 적히는 내용이 가사도우미와 루트에 대한 내용이 된다. 루트와 박사의 공통 관심사는 프로 야구인데, 루트는 박사의 생일에 구하기 힘든 야구 관련 카드를 구해서 선물하는데 여기에 대한 박사의 감사 표현이 더 선물 같을 만큼 감동을 자아낸다. 루트가 중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을 박사에게 전달할 만큼 두 사람의 우정과 인연은 오래 유지된다. 한편 이 영화는 사람의 기억력의 유지나 사실 여부가 그 사람의 존재를 입증하는 요소가 되는지에 관한 오래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박사는 여전히 기억력이 80분밖에 안되지만 루트와 그의 어머니, 박사 세 사람 사이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우정이 굳건하게 쌓였다. 어쩌면 영화가 주고 싶은 또 다른 메시지는 이런 것일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천재적인 기억력이 아니라 마음과 여는 행위 자체가 필수적이라는 메시지 말이다.    

숫자로 표현되는 삶의 본질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박사는 진심으로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수학은 딱딱하고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박사가 설명하는 숫자에는 인간애가 묻어난다. 혹자는 이를 수학과 문학의 결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언뜻 생각하기에 숫자, 즉 데이터와 휴머니즘은 연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연결을 해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존재 가치가 생겼다. 예를 들어 루트에 대해 루트 기호로써 어떤 숫자든지 자기의 품에 품는 관대함을 가졌다고 표현한다거나 본인이 소수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어떤 질서를 바탕으로 출현하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등의 표현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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