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 2022. 9. 25. 18:58

이터널 선샤인 (2005) / 기억은 지워도 마음은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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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선샤인의-두-주인공이-꽁꽁-언-찰스강-위에-누워있는-사진.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영화만큼 걸작으로 손꼽히는 영화가 있을까 싶다. 할리우드의 괴짜 작가 찰리 카우프만과 천재 연출가 미셸 공드리가 의기투합한 이 영화는 기억과 사랑의 함수관계에 대하여 깊은 시사점을 던졌다. 진심 어린 연애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 봤던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객들이 공감하는 부분을 풀어내되, 뻔한 로맨틱 코미디, 멜로드라마의 문법을 답습하지 않았다. 가히 천재적인 플롯과 영상미를 선보이면서도 난해한 예술영화처럼 굴지는 않았다. 영리하게 확보한 대중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클래식'을 등장시켰다.

물과 기름 같던 두 남녀의 화학반응

뉴욕에 사는 조엘(짐 캐리)은 옆집 사람이 자기 차를 찌그러트렸다는 확신이 들어도 그저 참고 넘어가는 성정의 소유자다. 여느 날처럼 회사로 출근하던 조엘은 갑자기 뭐에 홀린 사람처럼 몬타우크행 열차로 갈아탄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조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활달하고 적극적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의 클레멘타인과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침울한 느낌의 조엘은 물과 기름처럼 정 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그러나 이들은 알 수 없는 끌림과 함께 연인 관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영화의 플롯은 액자식 구성을 따르는데, 러닝타임 약 10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대체 이 둘의 관계가 뭐였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과거에도 깊은 연인 관계였다. 그러나 극과 극의 성향에 따른 성격 차이로 인해 다툼이 잦았고 결국 크게 싸운 뒤 헤어지게 된다. 클레멘타인은 충동적인 성격으로, 그 길로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인 라쿠나에 찾아가 조엘과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반면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화해를 위해 다시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그를 처음 보는 얼굴로 대한다. 심지어 조엘의 눈앞에서 새로운 남자와 썸을 타는 모습까지 보인다.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기억에서 삭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엘은 분노하여 자신도 그렇게 하기 위해 라쿠나를 찾는다. 조엘의 기억이 삭제되는 과정을 영화는 독창적이고 화려한 영상 연출로 전시하듯 보여준다. 이 시퀀스가 이터널 선샤인이 갖는 독창성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기괴할 수 있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내 머릿속의 기억 구조를 영화가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마디로, 너무 똑똑하다. 기억이 하나씩 삭제되던 중, 정말 소중한 기억을 삭제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자, 조엘의 무의식은 삭제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라쿠나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관계가 하나씩 드러나고,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마주 선다. 그들은 기억을 지우려 했던 시도를 반성하며 다시 한번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해 보기로 약속한다.    

기억과 사랑의 함수관계

우리는 기억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하니까 기억하게 되는 것일까?  마치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질문처럼 난해한 대목이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처럼,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마음에서 지워지는 것과는 별개의 사안이라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결국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들은 공허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의식 위에서만 오고 가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는 나도 모르는 나와 이미 잊어버린 그때의 내 모습이 존재한다. 또한 무의식 안에는 그 시절을 함께 했던 누군가도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지나간 사랑에 대해 무언가 정의 내리고 단언하는 행위 자체가 거의 무의미하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많은 이들이 칼 같은 언어로 지난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때의 마음과 기억이 어디에 숨어서 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실로는, 본인조차 알 수 없다. 나는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보고 어떤 메시지를 뽑으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지나간 사랑과 현재의 사랑을 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한 사람은 소우주에 비유된다. 두 사람의 소우주가 포개졌다면, 그 후에는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이어나가는 연인이 있는가 하면 각자의 길을 가는 연인도 있다. 후자라고 해서 반드시 저급한 사랑이었던 것은 아닌 만큼, 함께한 순간들에 대해서는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의식과 무의식 속의 잔재를 인정하는 내려놓을 때, 개인의 내면도 더욱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 같다.

볼 때마다 새로웠다

이터널 선샤인을 총 몇 번 감상한 것인지 이제는 모르겠다. 그만큼 많이 봤던 것 같다. 재밌는 점은, 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에 남는 장면이나 대사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때의 내 마음 상태나 연애 상황, 내면의 성숙도 등에 따라 달라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에게 툭툭 던지는 대사들 하나하나에는 정말 많은 맥락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최소 세 번은 봐야 영화의 참맛을 음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그 감정은,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 사람 때문에 울고 웃는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성숙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인생에서 남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뿐이라는 혹자의 말처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 일지 모른다. 비단 연인이 아닐지라도 가족, 친구, 나아가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전하는 작은 진심도 사랑의 범주에 속한다. 사랑한 기억으로 풍성한 무의식을 지닌 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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