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빠르망은 모니카 벨루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영화지만, 유럽 영화 특유의 분위기와 뻔하지 않은 로맨스극을 원한다면 더욱더 안성맞춤인 영화다. 원작의 퀄리티에 힘입어 할리우드 판으로 리메이크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두 영화는 같은 스토리 라인을 공유하지만 극 전체의 분위기와 결말이 꽤나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원작인 라빠르망을 더 선호한다. 이 영화를 본 지는 꽤 오래됐지만, 아직도 불길 가운데 클로즈업되었던 모니카 벨루치의 모습에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우아한 미스터리 치정극
비디오카메라 수리점에서 일하는 맥스(뱅상 카셀)는 모니터에 뜬 리자(모니카 벨루치)의 얼굴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우연히 창밖으로 리자를 발견한 맥스는 그대로 쫓아간다. 집까지 몰래 쫓아가 지켜보던 맥스는 리자에게 얼굴까지 들킨다. 리자는 이후 구두가게 일을 보던 맥스를 발견한다. 막스를 몰아붙일 것 같던 리자는 자신의 번호를 건넨다. 그렇게 연인이 된 그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리자는 막스와의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갑자기 떠난 리자 때문에 막스는 실연의 아픔을 겪는다. 여기까지는 많은 로맨스 영화의 줄거리와 비슷하다. 이후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되기까지 과정이 이어져야 할 것 같지만 라빠르망은 다른 전개를 보인다. 비디오 영상은 리자의 친구 알리스가 찍은 것이다. 알리스는 막스와 리자가 모르는 사이였을 때부터 남몰래 막스를 좋아하고 있었다. 수리점에 맡긴 사람도 알리스였다. 알리스가 처음 막스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막스는 리자를 발견했고 리자와 막스가 연인이 된 것이다. 리자는 알리스에게 부탁을 한다. 막스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알리스는 그것을 전하지 않는다. 막스와 리자의 사랑이 끝나게 된 것은 알리스의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미스터리 한 우연이 겹치고, 세월이 흘러 막스는 리자와 다시 연결된다. 하지만 막스에겐 새로운 약혼녀 뮤리엘이 있었고 리자의 약혼남, 알리스 등 주변 인물과의 관계 속에 알 수 없는 전개를 향해 간다.
배경과 해석
라빠르망은 프랑스어로 '아파트'라는 뜻이다. 아파트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사람과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이다. 영화는 한 커플의 사랑 이야기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입장과 감정을 복합적으로 섞어서 보여준다. 그로 인해 커플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고 오해와 오해가 쌓여서 전혀 다른 결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커플의 사랑 이야기가 아파트 공간만큼이나 복잡하고 다면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듯하다. 라빠르망의 주제의식은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인 위커 파크와 비교해 봤을 때 큰 차이를 가진다. 리메이크작의 경우, 원작이 말하는 사랑과 인생의 복합성보다는 커플의 사랑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성되는 과정에 더 치중해 묘사하였다. 반면 라빠르망은 사랑이라는 과정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여주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 타인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느끼게끔 설계되었다.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줌 아웃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 이유가 없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는 수많은 인연과 타이밍, 그것들의 화학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인생사를 곰곰이 곱씹게 하는 지점이 있다. 극중 물론 오해가 섞여 있었다 하더라도 나와 타인은 같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점에서 리자와 막스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둘의 인연이 거기까지였던 것은 아닐까. 한편, 막스의 경우 세 개의 반지로 비유한 세 여자 중에서 어떤 반지에도 인생을 다 거는 느낌은 아니었다.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 또한 관계의 향방을 정하는 변수가 되는 셈이다.
라빠르망에 대한 소회
라빠르망이라는 영화를 보게 된 것은 매우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영화의 제목이 내 입안에서 굴러가는 듯한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프랑스어인 것도, 영화가 프랑스 영화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모니카 벨루치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도 이 영화에서였다. 나는 지금도 전 세계 통틀어 최고의 미모를 지닌 여성으로 모니카 벨루치를 꼽는다. 같은 여자지만 정말 매혹적인, 배우를 할 수밖에 없는 상이라고 생각된다. 벨루치의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보기도 했을 만큼 나는 그녀의 팬이다. 벨루치가 라빠르망에서 만난 막스 역할의 뱅상 카셀과 실제 연인으로 발전해 결혼했던 이야기도 유명했다. 13년 만에 이혼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역시 연기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며 어머니의 전성기를 능가할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라빠르망이라는 극의 전체를 타고 흐르던 우울감과 미스터리 한 분위기,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에서 느껴졌던 시크한 정서가 너무 인상적이었고, 마음에 남았다. 개인적으로는 결말이 꼭 해피엔딩이 아니라 해도, 극이 가질 수 있는 힘을 폭발시켜주는 작품을 선호하는데, 라빠르망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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